알제리 사하라의 역사
Date 2022.11.27
알제리 사하라의 역사
아무도 살지 않는 광활한 불모지 사하라를 횡단했던 아프리카인들은 누구도 사막을 소유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이 없어 살 수 없는 땅을 차지할 필요도 없었다. 건널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유럽인들은 달랐다. 사막을 횡단한 후 자신들의 땅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의 땅이 되었다.
알제리를 공격해 점령한 프랑스군은 20년이 지난 1850년 사막 경계선에 있는 도시 라구아트까지 진출하고 더 내려가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보다 30년이 지난 1882년 오아시스 도시 음자브를 공격하고 통행세를 요구했다. 사막 사람들은 내겠다고 했다. 자신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얼마 정도의 돈은 줄 수 있었다. 1898년 프랑스인 장교가 알제리인 병사들을 앞세워 오아시스 도시 비스크라를 출발했다. 꼭 1년 만에 사하라를 횡단했다. 1893년 서아프리카를 공략해 강점한 프랑스는 동쪽 내륙으로 전진했다.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향해 북상했다. 기네 만에서 지중해 사이 서아프리카 땅 대부분이 ‘프랑스세력권’이 되었다. 영국은 반발했지만 쉽게 포기했다. “프랑스의 수탉들은 모래 바닥이나 쪼아 대라.” 프랑스의 상징 동물인 수탉을 빗대어 그렇게 빈정거리며 물러서는 데 합의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의 서쪽 절반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유럽 다른 나라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 중앙정부는 대강 행정 구획을 설정했다. 직선으로 뻗어 있는 알제리의 사하라 국경은 오아시스들을 자로 그어 연결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왜 직선인지는 해당 국가들이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프랑스가 그은 행정 경계선은 프랑스가 철수한 후 그대로 사하라에서 독립한 10개국의 국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경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것을 바꾸려고 할 경우 생길 분쟁이 너무 많아서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합의는 대체로 지켜졌지만 지리적 민족적 인류학적 현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알제리와 모로코는 싸웠으며 아직도 서로 관계가 소원하다. 사하라에 독립한 10개국 가운데 프랑스의 직할 통치를 받았던 알제리는 가장 많은 땅을 갖게 되었다. 알제리는 영토 대국이 되었다. 모로코의 5배, 튀니지의 15배다. 알제리는 7년 넘게 벌였던 독립전쟁에서 치렀던 희생에 대한 보상이며 전리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 나라들 특히 모로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국경 분쟁 때문에 알제리와 모로코는 전쟁을 했고 아직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모로코와 알제리 사이의 국경은 북쪽에만 있었다. 프랑스는 사막의 땅을 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두 나라의 영토를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1912년 모로코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후 사막에 행정 구획들을 만들긴 했지만 마음대로 바꾸곤 했다. 어차피 모두 자신들의 땅이니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발견된 1952년부터 비로소 관심을 쏟기 시작해 모로코 국경에 가까운 틴두프, 베샤르 일대를 알제리 소속 영토로 확정했다.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가 독립했다. 튀니지와 알제리 간의 국경은 튀니지와 프랑스 간의 협의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모로코와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로코는 사막에 대해서 현재 국경보다 훨씬 더 많은 땅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모로코가 알제리 독립군을 돕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가 지하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허락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모로코의 주장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모로코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제리 임시정부를 도왔다. 독립한 후 다시 협상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립한 후 약속의 주체였던 알제리 임시정부가 세력을 잃었다. 그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벤 벨라와 그의 측근은 모로코와 협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로부터 물려받은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공표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굳힐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 두 나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1956년, 63년, 75년에 발발한 ‘모래 전쟁’이다. 국제사회는 독립전쟁으로 존재감이 높아진 알제리 편을 들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긴밀했던 알제리와 모로코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알제리의 사막 영토는 약 2백만㎢, 한반도 면적의 10배에 이른다. 철,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주석, 아연 등 광물자원 그리고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땅이다. 꺼내 팔 수 있는 물건이 그득한 창고다. 독립에 합의하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사막의 땅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결국 손을 떼야 했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알제리는 경제개발을 시도했지만 ‘유가 파동’이라는 결정타를 맞고 실패했다. 현재 알제리 수출의 90% 이상을 지하자원이 차지하고 있다. 유럽이 거의 전량을 수입하고 있다. 수출에서 천연자원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면 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외국의 경제 상황이나 자원의 가격 변동에 직접 연동되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유럽의 경제가 침체되고 유가가 하락했을 때 알제리 경제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창고에는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 부상한 셰일 가스 매장량도 세계 3위다. 다만 가스를 함유한 암석층에 물을 분사해 가스를 모아 뽑아내는 생산 방식에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 것이 문제다. 지하 대수층에 있는 물을 오염 산업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알제리 대부분 영토가 수자원이 부족으로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사하라의 주민들은 가스 개발에 반대하고 있고 정부는 그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할 수 없다.
아무도 살지 않는 광활한 불모지 사하라를 횡단했던 아프리카인들은 누구도 사막을 소유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이 없어 살 수 없는 땅을 차지할 필요도 없었다. 건널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유럽인들은 달랐다. 사막을 횡단한 후 자신들의 땅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의 땅이 되었다.
알제리를 공격해 점령한 프랑스군은 20년이 지난 1850년 사막 경계선에 있는 도시 라구아트까지 진출하고 더 내려가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보다 30년이 지난 1882년 오아시스 도시 음자브를 공격하고 통행세를 요구했다. 사막 사람들은 내겠다고 했다. 자신들에게 간섭하지 않는다면 얼마 정도의 돈은 줄 수 있었다. 1898년 프랑스인 장교가 알제리인 병사들을 앞세워 오아시스 도시 비스크라를 출발했다. 꼭 1년 만에 사하라를 횡단했다. 1893년 서아프리카를 공략해 강점한 프랑스는 동쪽 내륙으로 전진했다. 그 다음에는 지중해를 향해 북상했다. 기네 만에서 지중해 사이 서아프리카 땅 대부분이 ‘프랑스세력권’이 되었다. 영국은 반발했지만 쉽게 포기했다. “프랑스의 수탉들은 모래 바닥이나 쪼아 대라.” 프랑스의 상징 동물인 수탉을 빗대어 그렇게 빈정거리며 물러서는 데 합의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의 서쪽 절반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유럽 다른 나라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파리 중앙정부는 대강 행정 구획을 설정했다. 직선으로 뻗어 있는 알제리의 사하라 국경은 오아시스들을 자로 그어 연결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이 왜 직선인지는 해당 국가들이 아니라 유럽인들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프랑스가 그은 행정 경계선은 프랑스가 철수한 후 그대로 사하라에서 독립한 10개국의 국경이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국경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어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것을 바꾸려고 할 경우 생길 분쟁이 너무 많아서 유럽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합의는 대체로 지켜졌지만 지리적 민족적 인류학적 현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알제리와 모로코는 싸웠으며 아직도 서로 관계가 소원하다. 사하라에 독립한 10개국 가운데 프랑스의 직할 통치를 받았던 알제리는 가장 많은 땅을 갖게 되었다. 알제리는 영토 대국이 되었다. 모로코의 5배, 튀니지의 15배다. 알제리는 7년 넘게 벌였던 독립전쟁에서 치렀던 희생에 대한 보상이며 전리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형제 나라들 특히 모로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국경 분쟁 때문에 알제리와 모로코는 전쟁을 했고 아직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모로코와 알제리 사이의 국경은 북쪽에만 있었다. 프랑스는 사막의 땅을 차지하는 데만 신경을 썼을 뿐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두 나라의 영토를 정확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1912년 모로코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후 사막에 행정 구획들을 만들긴 했지만 마음대로 바꾸곤 했다. 어차피 모두 자신들의 땅이니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석유를 비롯한 지하자원이 발견된 1952년부터 비로소 관심을 쏟기 시작해 모로코 국경에 가까운 틴두프, 베샤르 일대를 알제리 소속 영토로 확정했다.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가 독립했다. 튀니지와 알제리 간의 국경은 튀니지와 프랑스 간의 협의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모로코와는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로코는 사막에 대해서 현재 국경보다 훨씬 더 많은 땅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모로코가 알제리 독립군을 돕지 않을 것이며, 프랑스가 지하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허락한다는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모로코의 주장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모로코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알제리 임시정부를 도왔다. 독립한 후 다시 협상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립한 후 약속의 주체였던 알제리 임시정부가 세력을 잃었다. 그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벤 벨라와 그의 측근은 모로코와 협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로부터 물려받은 국경선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공표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굳힐 수 있는 기회로 활용했다. 두 나라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1956년, 63년, 75년에 발발한 ‘모래 전쟁’이다. 국제사회는 독립전쟁으로 존재감이 높아진 알제리 편을 들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긴밀했던 알제리와 모로코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알제리의 사막 영토는 약 2백만㎢, 한반도 면적의 10배에 이른다. 철,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주석, 아연 등 광물자원 그리고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되어 있는 땅이다. 꺼내 팔 수 있는 물건이 그득한 창고다. 독립에 합의하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사막의 땅을 놓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결국 손을 떼야 했다.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알제리는 경제개발을 시도했지만 ‘유가 파동’이라는 결정타를 맞고 실패했다. 현재 알제리 수출의 90% 이상을 지하자원이 차지하고 있다. 유럽이 거의 전량을 수입하고 있다. 수출에서 천연자원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면 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외국의 경제 상황이나 자원의 가격 변동에 직접 연동되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유럽의 경제가 침체되고 유가가 하락했을 때 알제리 경제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창고에는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으로 부상한 셰일 가스 매장량도 세계 3위다. 다만 가스를 함유한 암석층에 물을 분사해 가스를 모아 뽑아내는 생산 방식에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 것이 문제다. 지하 대수층에 있는 물을 오염 산업에 쓸 수 없는 것이다. 알제리 대부분 영토가 수자원이 부족으로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사하라의 주민들은 가스 개발에 반대하고 있고 정부는 그 반대를 무릅쓰고 개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