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ITUTE FOR EURO-AFRICAN STUDIES

학술활동

김정숙 교수의 알제리 알아보기

알제리 사람들

Date 202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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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레브의 선주민 베르베르인

북아프리카는 아랍인이 사는 이슬람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소수 민족 베르베르인이 아랍인과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그레브는 아랍인의 땅이기 전에 베르베르인의 땅이었다. 북쪽 지중해 해안에서 사하라 사막 남쪽 경계선까지, 서쪽 이집트 국경에서 동쪽 대서양 연안까지 마그레브 전체에 폭넓게 퍼져 살고 있는 베르베르인 인구는 몇 명인가?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공식 비공식으로 발표되는 수치들이 거의 천 만까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베르베르인과 아랍인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최대 3,000만 명까지 추산하는데, 그렇다면 마그레브 전체 인구의 거의에 달하는 숫자다. 3천만 명이 마그레브 다섯 나라에 골고루 퍼져 사는 것은 아니다. 서쪽으로 갈수록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다. 리비아와 튀니지에서는 전체 인구의 1% 정도지만 알제리에서는 25%이고 모로코에서는 40%. 서쪽으로 갈수록 베르베르인의 비중이 커지는 것은 아랍인의 영향력과 상관 관계가 있다. 알제리의 베르베르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30%, 900~1,500만 명이다.   

베르베르인은 마그레브 외부에서 도래한 민족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고고학과 집단 유전학 연구의 결과는 외부 기원설을 부정한다. 마그레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기원전 4천부터 지중해와 육로로 이주한 여러 민족들이 섞이고 동화하며 하나의 민족 집단을 형성했다고 본다. 인종이나 혈통보다는 지리적으로 집단화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집단 유전자 검사는 서쪽 이베리아반도의 사람들과 동쪽 아랍인들이 다양한 정도로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사하라 사막 너머 남쪽에 사는 흑 아프리카와는 혼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르베르인들의 피부가 희다고 해서 유럽에서는 북아프리카를 사하라 이남 흑 아프리카와 구분해백 아프리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부족 단위 생활을 영위했던 베르베르인들은 사회구조나 구비 전통 외에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데, 언어가 그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열쇠다. 베르베르어는 아랍어와는 계통이 달리 셈어족에 속하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이 발달했지만 단일 구조로 수렴된다. ‘티피나그(tifinagh)’라는 문자가 있었으나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아 발달하지 못했다. 20세기에 이르러 정체성 회복의 차원에서티피나그를 보완하여 여러 베르베르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베르베르인의 비중이 높은 모로코와 알제리 일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인의 평등주의  

베르베르인들은 동쪽에 사는 이웃 이집트 사람들과 매우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전제군주 파라오를 중심으로 중앙집권 사회를 만들었던 이집트 사람들과 달리 함께 모여 세력을 키우려 하지 않았다. 권위를 거부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공동체와 관련된 사안들은 남자 전원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직접민주주의적 집단 운영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원시 민주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현재까지도 기본 정신이 유지되고 있다. 평등주의적 사고가 강하여 어떤 구성원이 더 많은 권력이나 재산을 갖지 못하게 했다. 예컨대 너무 많은 올리브유와 밀을 가지게 된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부족 공동체들 간에도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공동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연합했지만 다른 공동체를 종속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종속 당하는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목이나 반 유목 집단에서도 상황이 비슷했다. 전쟁이나 집단 이동을 위해 필요한 지도자를 지명하더라도 한시적이고 상대적인 권위만 인정했으며, 지명되었던 사람은 전투가 끝나거나 부족의 이동이 끝나고 나면 물러났다. 위계 질서를 갖춘 권력이 형성되기 어려웠다. 종교를 받아들일 때에도 권의주의적인 입장은 배척했다. 기독교의 도나티우스파나 이슬람의 카와리지파와 같은 신 앞에서 만인의 평등을 표방하는 입장에 특히 심취했다.

절대 평등주의는 그들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했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성립되지 않았다. 성립되었다 해도 권력 행사의 반경이 작았고 약했으며 그 기간도 길지 않았다. 감옥과 같은 국가 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이 없었고 가장 심한 처벌은 죄를 지은 사람의 집을 태워버리고 추방하는 정도였다. 중앙집권적 권력의 부재는 외부 침공에 매우 취약했다는 사실을 일부 설명한다. 지역이 근대국가로 진입하는 시기가 지연되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능력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효율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던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 외부 군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베르베르의 역사를 로마시대, 반달족의 시대, 오스만 터키 시대, 프랑스 점령 시대 등 일련의 외부 침공으로 분절해 구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베르인의 또 다른 특징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집요하게 버티며역사를 이어왔다는 것이다. 외부 침공의 역사가 이어졌지만 이들은 번번이 자신의 땅을 되찾고 정체성을 간직해 왔다.

베르베르(berbère)

마그레브의 선주민을 부르는 프랑스어베르베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어원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이방인이라는 의미로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불렀다는 데서 기원한 것이다. 유럽어에서야만적(babaric, barbare)’이라는 의미의 단어들도 거기서 파생되어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실상 오랜 기간 한 국가나 민족으로 통일된 상태에 있지 않았던 베르베르인을 부르는 명칭은 하나일 수 없었다. 누미디아, 게트루리아. 가라만테스, 제나타 등등 여러 부족 혹은 부족 연합의 이름이 있었을 뿐이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 주변 나라들의 자료에는 리부, 막시에스, 아틀란테스 등 대단히 다양한 명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광대한 땅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베르베르라는 단어로 묶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1세기 초 로마시대로 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어의이방인이라는 보통 명사가 특정 지역 사람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로마인들의 사용했던 명칭은 프랑스어를 비롯한 라틴어 계열 언어들에 계승되어베르베르라는 단어가 되었다. 영어의버벌(Berber)’도 여기서 파생한 것이다. 북아프리카를 베르베르인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베르베리(Berbérie)’ 혹은바르바리(Barbarie)’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16세기 지중해를 오가는 유럽인 선박을 공격했던 무슬림 선박들을바르바리 해적(Barbary pirates)’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거점이었던 북아프리카 해안을바르바리 해안이라고 불렀던 것은 거기서 온 것이다. 베르베르인들은 이웃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부르는 이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아마지그라고 칭한다. ‘고귀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복수형은이마지겐이다.